2016년 3월, 서울에서 펼쳐진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1승 4패로 끝난 이 대결은 단순한 바둑 게임을 넘어, 인류가 AI의 위력을 처음 실감한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10년, 바둑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이세돌의 고백
당시 세계 최강 기사 중 한 명이었던 이세돌 9단은 최근 인터뷰에서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고 당시 심경을 회고했다. 인간이 수천 년간 쌓아온 바둑의 지혜가 단 5일 만에 AI에 의해 재편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이 4국에서 거둔 1승은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78수’로 불리는 이 승리는 AI를 상대로 인간이 거둔 유일한 승리로, 인간의 창의성과 직관이 여전히 가치 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바둑 훈련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0년이 지난 현재, 바둑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 바둑 국가대표 선수들은 훈련의 70~80%를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진행한다. 과거에는 기보를 복기하며 선배 기사들과 토론했다면, 이제는 AI가 추천하는 승률과 수법을 연구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AI는 이제 바둑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훈련 파트너”라며 “실시간으로 승률을 분석하고 최선의 수를 제시하는 AI 덕분에 선수들의 실력 향상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AI 세대의 절대강자, 신진서의 등장
AI가 보급된 이후 성장한 첫 세대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가 신진서 9단이다.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 9단은 AI의 수법을 가장 완벽하게 체화한 기사로 평가받는다.
알파고 10주년을 맞아 신진서 9단과 과거 알파고의 재대결 논의가 진행될 정도로, AI는 이제 ‘도전자’가 아닌 ‘스승이자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바둑 교육의 위기와 변화
하지만 변화에는 그림자도 따라왔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창의성이 AI에 의해 데이터화되면서 전통적인 바둑 교육 체계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일부 대학의 바둑학과는 폐과 위기를 맞았고, 전통적인 사제 관계는 약화됐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AI 시대에 인간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강한 수를 두는 것을 넘어, 바둑의 아름다움과 철학을 전하는 것이 인간 바둑의 새로운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한 수’는 누가 찾는가
“AI가 인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수를 찾아내는 시대에, 인간의 바둑이란 무엇인가?” 이는 바둑계가 마주한 철학적 질문이다.
소설가 장강명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바둑계를 취재하고 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조훈현 9단은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이제는 AI와 함께 바둑의 새로운 경지를 탐구할 수 있게 됐다”며 “완벽한 수가 아닌, 의미 있는 수를 두는 것이 인간 바둑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바둑판을 넘어선 기술의 확장
알파고의 유산은 바둑판 안에 머물지 않았다. 알파고를 개발한 데미스 허사비스는 바둑 AI 기술을 발전시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알파폴드’를 개발했고, 이는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바둑의 복잡한 경우의 수에서 최적해를 찾는 기술이 생명과학, 신약 개발, 질병 치료 등 인류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확장된 것이다. 바둑판 안의 지혜가 인류 전체의 자산이 된 셈이다.
1월 5일 방송, 10년의 기록
오는 1월 5일 방송될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이세돌 9단의 은퇴 후 회고와 함께, 조훈현, 유창혁 등 바둑계 거장들이 말하는 ‘절망’에서 ‘상생’으로의 여정이 담길 예정이다.
또한 현재 국가대표 선수들의 AI 활용 훈련 현장과 바둑 교육의 변화상도 공개되어, AI와 인간이 어떻게 협력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알파고 쇼크 10년, 바둑계는 AI를 적이 아닌 동반자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바둑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취재후기]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젊은 바둑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AI는 제게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미처 보지 못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생님이자,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죠.”
10년 전 ‘인간 대 기계’의 대결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고 있다. 알파고가 남긴 진짜 유산은 승부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에게 던진 질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